가끔 몹시 힘들 때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는 말 중에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인간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헤밍웨이-어려울 때 떠올리는 말이다.
어제 6월15일 월요일, 월초에 한 번 나갔다 왔으나 지난 주일부터 다시 바다 냄새가 그리워지기 시작하기에 꿍꿍이속으로 시간을 마련해 바다로 나섰다. 낚시하기에 그리 좋은 물때는 아니지만 08시16분 만조, 14시 51분 간조, 고저차 380M의 조금.
며칠 동안 바다가 잔잔했고 물살도 세지 않으니 잘만하면 손맛을 볼 것도 같아 아직도 다리가 시원치 않아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마누라를 꼬드겨 나섰다. 낚시 초보는 물심이 약할 때 배워야 편한 법이라고 설득하면서.
오늘은 예약이 별로 없는지 가게가 한산하다. 5명 단체손님 두 팀과 세 명 합쳐 모두 13명 예정이었는데 막상 출항시간이 되었건만 몇 명은 나타날 기미가 없다. 예정에 없던 마누라까지 탔어도 고작 10명. 네 명의 인간이 이제 막 자리 잡으려는 한국 낚시계의 예약문화를 망가뜨리는 중이다. 오랜만에 널찍하게 낚시하게 된 우리는 좋지만 주인 부부는 속이 탔으리라.
예상했던 대로 바다는 부드러운 물결로 배를 애무하고 수평선위에 걸친 구름들은 만물상을 조각하는 중이다. 구름 모습이 모두 동물 같아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쪽은 가오리처럼 꼬리가 긴데 머리가 뭉툭해 보이는 저쪽 구름은 지난주일 해풍님이 올린 아귀와 생김새가 같아 보이고 그 옆으로는 우럭이 헤엄치는 중이다.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민첩하게 부지런을 떨어 마누라가 쓸 낚시까지 채비를 끝내고 미끼를 끼워 바친 후 내 채비를 내리려니 아무래도 조금씩 늦어진다.
이런 일 저런 일 뒷바라지 하다보면 낚시에는 고기가 아니라 침선, 어초가 매달리게 마련. 우럭 얼굴은 옆의 손님들이 잡는 5짜 6자를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하며 나는 봉돌과 채비만 쉬지 않고 바다에 버린다.
다른 사람과의 줄 엉킴을 피하기 위해 배 꽁무니로 귀양 보낸 마누리가 사무장의 도움으로 첫 번째 우럭을 대면하더니 연이어 혼자 힘으로 미끼 끼고 줄 높이 세팅하고 부산을 떤 끝에 우럭 사냥에 성공한다. 3짜는 되어 보인다.
“으응 이렇게 하는 거구나! 쉬운데 뭘.”
아직 한 마리도 대면하지 못한 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 고기 한 마리 못 잡자 그를 따르던 조수격인 꼬맹이 마놀린마저 절망감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든 닷새 되던 날 먼 바다에 나와 사흘간의 사투 끝에 난생 처음 보는 큰 고기를 낚는 행운을 얻었지만 곧이어 상어의 습격을 받아 모두 잃고 만다. 너무 커서 배에 싣지도 못한 채 끌고 오던 아름다운 청새치는 이제 한 낱 흉물스러운 뼈다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너무 멀리 나오고 말았어. 너에게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조금 전까지 투쟁대상이었던 큰 고기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산티아고는 그의 꿈을 앗아간, 처음에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싸우다가 차츰 정이 든, 자신을 닮은 듯 용감한 상어들을 향해 내뱉는다.
‘너희가 나를 파멸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절대로 패배시키지는 못해!’
산티아고 노인이 낚은 그 청새치-마린은 그가 인생의 낚시대회에서 마감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릴 때 걸어 올린 마지막 물고기, ‘호루라기 물고기인 셈이다’
그리 시원치 않은 하루의 막바지 파장 무렵, 선장이 일과의 종료를 알리는 부저를 울린다. 이제는 더 낚고 싶어도 접어야하는 아쉬운 순간 오늘의 부진을 만회하고 싶어 6m 침선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바닥을 긁던 내 낚시가 갑자기 꿈틀댄다. 곧이어 전해지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힘찬 생명의 몸부림.
낚시를 다 거둬들인 줄 알고 출발하려는 선장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 지르니 선장이 화들짝 놀라 배를 멈춘다. 저 깊은 바다 속으로부터 나의 호루라기 물고기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럭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호루라기 물고기란-낚시 평론가 폴 퀸네트의 책- 낚시로 건져올린 인생이야기 305페이지에서 따온 말.**
내 금싸리기 같은 쌈지돈 내주고 탄 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 예약 취소자로 인해 선장에게 미안한 맘 금치 못하고
선장 눈치보며 바다로 향하는 그 기분 잘 알지요.
선장이 흥이나야 포인트도 잘 들어가고 그럴텐데...
할 수 있나요.
나를 위해서도 선장을 위해서도
열심히 낚시하는 수 밖에요...
다음 날 조황이 대박이었다는 소식을 듣게 해주면
예약 취소는 줄어들려나???
한편으론 낚시꾼이 오죽하면 낚시스케쥴 취소하겠습니까?
나름대로 저간의 사정이 있겠지만...
맑은샘님의 글 중 예약 취소자 얘기가 있어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