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쓰던 겨울 장비를 여름용으로 바꿀 겸 인터넷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하고 퇴근길에 한보따리 들고 나오니 마음은 벌써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 같습니다.
햇빛 가리개, 여름용 장갑, 그리고 새로 개발했다는 침선 낚시 바늘. 보기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 대천까지는 왕복 360km. 편도 2시간 30분 소요예정. 예정에 없이 나서는 길이라 카풀동료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혼자 간다면 늙은 마누라가 위험하다고 기를 쓰고 말릴 것이 뻔해 인천에 가서 동호회 버스 탄다고 둘러대고 목요일 자정 조금 전에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장장 2시간 넘게 180km 장거리 야간 운전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온 몸을 조여 옵니다.
승선 명부 빈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선실에 누었노라니 밖이 웅성거리며 자리 배정이 잘못되었다고 자리를 바꾸어 줄 수 없냐고 사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못들은 척 그냥 꿈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이 배의 구조를 잘 모르는 승객이 고물 쪽의 자리를 자기들이 모두 차지하고 재미있게 놀려고 10번부터 몇 자리를 선점했는데 그 중간에 화장실이 있는 걸 보고 낭패감에 당황하는 모양입니다.
내가 9번에 끼어있으니 나중에 바꾸어주어야지, 혼자 생각하다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운전은 힘든 노동임에 틀림없나봅니다.
한숨 푹 자고 기지개키며 나오자 사무장이 반색하며 장애인이 한 사람 있어 일행이 같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협조해 줄 수 없냐고 말을 붙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내 장비를 꺼내어 반대편으로 옮기려는데 또 한 사람이 맨 끝 쪽을 가리키며 자기와 자리를 다시 한 번 바꿔줄 수 없냐고 묻기에 나도 모르게
이보시오! 나이가 많아지면 이것저것 모두 장애가 온다오. 눈도 안보이지, 팔다리 기운도 없지,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거시기도 안서지........ 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그냥 고개만 내저었습니다. 한 번 물러섰더니 동네북 취급할 모양입니다. 남을 도와주었다는 우쭐했던 유치한 기분은 저만큼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는 중입니다.
6M 침선이라는 방송을 들으며 낚시를 내렸더니 4m 높이에서 토도독거리며 손바닥만 한 우럭이 반갑다고 인사합니다. 왼쪽 라인에서 나온 첫 번째 고기. 평소 습관대로 방생했더니 찌개꺼리 버린다는 사무장의 지청구가 날아왔습니다.
어쨌거나 배에서 첫 고기를 낚았다는 자부심에 뿌듯했는데 행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입질한 고기는 올라오다 떨어지거나 쌍걸이 노리다가 어초에 처박히기. 헛손질, 줄 엉키기는 기본이고 줄 내리는 중에 봉돌 떨어져나가기, 심지어 어초에 슬려 목줄이 통째로 날아가는 등등,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이상한 일만 벌어집니다. 옆 조사님에게까지 그 증세가 전염되는지 피해가 막심하기에 하도 기가 막혀 낚시를 접을까 망설이는데 오른쪽 옆 조사의 낚싯대가 요동칩니다.
당황하여 급하게 풀 스피드로 올리기에 중간으로 바꾸라고 소리 질러 말린 후 올라오는 우럭을 보니 얼핏 보아도 6자에 가까운 괴물입니다. 아까부터 곁눈질로 보며 걱정하던 그 미끼에 달려 나온 대물 우럭을 보며 속으로 웃을수밖에....
그 분은 낚시를 처음 오셨는지, 장비도 가계에서 빌려 나오셨고 처음에는 목줄과 미끼는 너무 길어 낚시 내릴 때마다 두 개의 낚시가 서로 엉키기 일쑤였습니다.
보다 못해 목줄도 짧게 하고 미끼도 서로 간섭하지 못하게 짧게 쓰시라고 충고했는데 나중에 보니 목줄 길이는 겨우 한 뼘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짧아졌고 미끼는 뱀장어만큼이나 큰 미꾸라지를 끼었기에 혼자 웃고 말았는데 그 미끼를 6자에 가까운 대물이 물고 나오는 것 아닌가!
‘낚시는 과학’이라고 설파하신 분이 여기 어부지리에 계시지만 오늘 내가 본 낚시는 오로지 ‘운’이었습니다.
왼쪽 옆에 계신 손님은 갖가지 루어와 생미끼를 현란하게 섞어 쓰시며 틈틈이 우럭이며 노래미를 잘도 낚아 올리는 중인데 어찌된 일인지 모든 입질은 내게서 건너뛰고 맙니다.
낚싯배에서야 언제나 남의 자리가 좋게 보이고 앞에서는 뒤쪽으로만 댄다고 불평하고 뒤에서는 앞으로만 배를 댄다고 입을 비쭉거리기 마련이지만 입질이 나만 건너 뛸 때 느끼는 절망감은 당해본 사람만 알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맨 앞쪽부터 차례로 들어오던 입질이 드디어 나에게도 당차게 전해집니다. 모두 다 3자, 4자, 준수한 크기의 우럭을 들어 올리는데, 내 낚시는 유독 더 힘차게 몸부림칩니다.
드디어 부처님이 내 소망을 들어주셨구나!
살생하지 말라는 날에 낚시하는 허물도 눈감아 주시고, 자리 바꾸자는 사람에게 인색하게 군 욕심도 눈감아 주시고, 이웃에게 허튼소리 훈수한 잘못도 다 덮어주시는구나! 감격하면서 끌어 올리는데 푸른 물속에서 앙탈하는 고기 색깔이 좀 이상합니다. 어렵사리 꺼내보니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베도라치. 꼭 가물치처럼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 40cm는 족히 되어 보입니다.
얼른 낚시 바늘 채 잘라서 뱃전에 던져버렸더니 어떤 분이 매운탕꺼리로 좋다며 가져가 손질하시더군요. 그것까지 버리고나니 몇 마리 잡았던 노래미들은 이미 이웃의 횟감으로 내주었기에 속은 오히려 개운해졌습니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게지.
사실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날로 치부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고맙고도 고마운 부처님의 배려를 흠뻑 입은 날이었습니다.
만약 우럭 몇 마리 잡아넣고 희희낙락하여 술이라도 한 잔 걸쳤으면 올라가는 길에 졸려서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낚시 안 되게 만들어 수시로 선실에 들어가 쉬게 한 그분의 배려를 모르고속 좁게 혼자 짜증만 낸 꼴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낚시 끝 무렵, 다른 분들 아무도 입질 못 받을 때는 나 혼자 4자 중반의 대물을 연속 두 마리, 그리고 구이 용 작은 놈 하나를 잡았으니 마누라가 즐기는 횟감을 그분이 초파일 선물로 내어주신 셈 아닌가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오시는 날 오후, 무사히 돌아와 차가운 매주 한 잔 마시면서 생각해 봅니다.
스님들이 흔히 쓰는 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원래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살아가는 동안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 사람이건 짐승이건, 꽃이나 강물, 시간까지 모두 나와 인연이 있어 만나게 되고 인연이 끝나면 그냥 훌훌 털고 헤어지게 되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 것을.......
모든 인연이 새삼스러웠던 하루, 本來無一物, 갈 때는 빈손이었으나 이었으나 낚시하면서 부처님의 은혜, 싱싱한 우럭, 그리고 약간 겸손해진 마음, 세 가지를 얻었으니 돌아올때는 歸來有三物 -귀래유삼물의 수지맞은 하루였습니다.
맑은샘님이 부처님이시고,
흉내 내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