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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을 예고하는 춘분도 지났는데, 요 며칠 날씨는 계속 한겨울입니다.
북쪽으로 쫓겨간 찬대륙 고기압이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하며 나타난 현상이라하지만
언제나 이쯤때면 아름답게 봄꽃피는 꼴을 꼭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저는 싫습니다..^^
남녘엔 벌써 수줍은 소녀의 볼색깔을 닮은 매화와 노란 산수유꽃 그리고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설레임을 안고 강진의 마량항으로 평촌서 광어잡이님을 만나 버스편으로
밤10시30분에 출발합니다.
그런데 총 탑승자는 저를 포함 총 8분입니다. 괜시리 버스 기사님의 눈치가 보입니다.
이를 어쩌나?? 8분 왕복요금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나오지 않는 운행인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선단'이라고만 쓴 버스의 서** 버스기사님은 껄껄껄 웃으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합니다. 이럴때는 손해지만, 믿음과 신뢰로 통하다보면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유지타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미안합니다.
이러한 훈훈한 향훈에 속으로 멋진 박수를 보냈습니다.
서쪽하늘에서 방긋 읏고있는 반달님도 기분 좋은 이밤의 고혹한 남녘행 길을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버스가 속력을 줄이면서 원을 그리는 것으로 강진에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월출산 끝자락, 사방이고요에 묻히고 달빛의 실루엣속에 강진평야는 이미 파릇파릇한
약동의 숨결들이 느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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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행기보다도 유배의 땅, 비치색의 찬란한 고려청자의 도요지로서 찬란한 문화 에술의 고장인
강진(康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1,000년의 역시를 가진 고려청자는 14세기까지 그 명성을 날렸었지요.
이후 조선시대에 그 맥이 끊어져 약 600년동안 공백을 가졌으나 최근들어 그 가치를 인식, 청자의
성지(聖地)답게 유능한 도공들의 비지땀을 흘리며 천년비색의 신비를 볏겨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고급 고려청자는 기종과 기형이 다양하고 문양, 유약, 태토(胎土), 번조(燔造)기법등으로
생산하여 그 명성으로 고려시대 왕족 및 지배계층이 많은 개경(개성의 고려때 이름)으로 또는
중국으로 많이 팔려 나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출조하던 충남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본들이 많이 발견되는 그 유물 대다수가
바로 강진에서 생산된 청자들로서 그 당시 육로가 발달치 않아 주로 배로 운송하던 것들인데,
높이가 대략 2~4m의 뻘속에 쳐박혀 있는 소위 말하는 솔솔한 재미의 '똥침선' 경우 거의가 이 즈음에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조류가 빨라 선박들의 침몰이 잦은 난행량(難行梁) 탓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조 중종25년 간행>의 기록을 보면 대섬, 마도일대인 안흥량에서 침몰한 조운
선(漕運船) 피해현황이(조선 태조~세조, 60년간) 선박 200여척, 1,200여명의
인명손실, 쌀 15,000여섬이 수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하나, 유배의 땅이라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고산 윤선도(가까운 보길도에서 유배)와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외5대조부인 윤선도는 1587년도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제주로로 떠나면서
너무 아름다운 보길도를 보고 반해서 뱃머리를 돌려 정착하였고, 여기서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집필하셨는데, 어부로 살지는 않았지만, 자연속에서 세상시름 잊고 한적하고 청일한 삶속에서
바다를 관찰하고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관조자로서의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자로서 유배당한 이곳에서 후학을 돌보며, 애민사상(愛民思想)의 목민심서나
흠흠신서의 위대한 저술 활동을 꾸준히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는 오늘날 많은 탐장(貪臟)질 공직자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금과옥조와 같은
귀중한 서적으로 옛것을 익히므로서 새것을 얻는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교훈을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이분들 말고도 100여명에 가까운 많은 분들이 은거나 귀양살이를 했던 곳으로 유배의 문화가 시작되었지요.
특히, 이곳은 음식문화가 유별스럽기도 하는데, 지리적 여건상 산과 바다, 넓은 들판에 탐진강이 함께 어우러져
풍부한 제철 식재료로 육해진미로 맛과 향이 만들어 내는 예술음식이 자랑이기도 합니다.
유배나 은거하던 지자(知者)들을 찾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또 조선시대엔 낙향(落鄕)한
중앙관료까지 합세해 예전 고급스럽던 입맛을 찾다보니 지금의 화려한 강진의 한정식 밥상을 꽃피우게
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남도 문화와 역사 그리고 남녘지방의 서정(敍情)을 찾아가는 여정은 1930년대의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때
이곳 출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을 만나면서 내 마음도 밝아졌습니다.
유난히 봄꽃을 좋아했던 시인은 가날프고 질긴 서정을 세련되고 구수하며 나긋나긋한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하였는데,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봄꽃중에 유독 크고 탐스러우며 꽃이 화려한 모란(목단:牧丹)을 비유로 영원할 수 없는 세상
삶들에게 피고지는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주어진 시간을 아름답게 사랑하며, 짦은것에 환희할 줄
아는 여유의 삶을 가져보라는 이 詩의 주제에 감사하는 사이, 버스는 마량항에 도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출발하여 전날 일행들과 즐거운 밤을 보냈던 우렁각시님, 막무가네님, 잉어꾼님이
살갑게 반겨주십니다.
온라인상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게 안부를 나누던 사이라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벌써 우렁각시님이 이슬이와 우유빛 막걸리를 개인차에서 꺼내 한짝씩이나 배에 실습니다..
오늘은 열심히 잡지만, 짬짬히 잡은 열기로 실컷 회를 먹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행들이 배에 실던 두짝의 술을 보며 의아해 하지만 우리는 두짝의 술이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어젯밤 젊은 미남으로 능글능글 살갑기로 유명한 사무장님까지 합세하여 1차,2차에 걸쳐
마량항의 술을 몽땅 먹어 치웠다는 믿을만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모두 쌩쌩합니다..^^
바람도 파도도 없이 잔잔한 새벽이지만 밤바다의 공기는 무척 찹니다.
전날 기상이 좋지 않아 출조하지 않았다기에 내심 걱정을 했으나
지금의 날씨는 잠포록하여 올가망스럽던 마음이 갠날처럼 안심이 됩니다.
청룡같았던 예전에 비해 나이가 듬에 어쩔 수 없는 노쇠현상으로 일찍 선실을 찾습니다.
파고가 없어 그런지 배는 물위를 요둉없이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관계로 잠이 사르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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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이야기들은 사진아래 설명으로 대신함을 이해해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 주야조사 -- 13.3.25
원래 영감님은 초저녁 잠이 많고 새벽 잠이 없는 법인데, 참 대단하신 열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ㅋㅋ. 죄송합니다~~)
광어잡이님, 우렁각시님 등과 어우러진 사진 한 장이 제 눈길을 잡습니다.
바다로 가야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이 사진 한 장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봄나들이~~ 이 좋은 분위기에 씨알 좋은 열기까지 덩달아 난리 부르스(?)를 함께 춰주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여행이 되셨겠네요.
즐낚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주야조사님의 젊은 날이 '청룡 같았다'고 누가 그러셨어요?
제가 보기에는 자뻑 같은데요.ㅋㅋ (튑니다. =3=3=3=3=3=3=3=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