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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하응백
2011.07.27 15:52

강물의 엣세이 1

조회 수 3461 댓글 2


닉네임 이야기

일전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서예가 한 분을 찾아뵌 적이 있다. 이 분이 갑자기 나에게 호(號)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호 같은 거 없다고 대답했더니, 약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업실로 가서 일필휘지로 ‘詩山藝舍(시산예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앞으로 ‘詩山’으로 호를 삼으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문학 나부랭이나 한다고 하니 문학으로 산처럼 큰 업적을 쌓으라는 덕담쯤으로 여겨졌다. 그 분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詩山’은 너무 커서 ‘詩卒’(시졸) 쯤으로 했어도 과분했지 않나 싶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상들은 이름(家名) 외에도 자(字)와 호(號)를 동시에 사용했다. 자는 대개 20세가 넘으면 웃어른 또는 선생이 지어 주거나 스스로 지어 사용했다. 자가 붙은 후로는 윗사람에게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호는 이름이나 자 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칭호였다. 추사 김정희니, 백범 김구니, 도산 안창호니 하는 말이 아주 귀에 익은 것처럼 호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사실 한 세대 전 사람만 해도 호들을 많이 가졌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호는 後廣(후광)이었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호는 巨山(거산)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전대통령은? 호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淸溪(청계)란 호가 뜬다. 급조한 것 같아 좀 우습기는 하다.
요즘에는 호를 사용하는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정치인들을 호명할 때 영문이니셜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YS니 DJ니 MB니 하는 것이 그것인데, 간편하긴 하지만 좀 야박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현대판 호가 다량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싱글라인코리아(배낚시동호회 이름, 싱글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줄 하나로 낚시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의 회원인데 닉네임이 강물이다. ‘강태공’, ‘백두조사’, ‘다섯마리’, ‘행복한어신’, ‘꽝조사’, ‘눈먼고기’, ‘핸펀과우럭사이’ 등등이 우리 회원들의 닉네임이다.

‘다섯마리’님은 늘 다섯 마리 이상만 잡게 해달라고 ‘다섯마리’이고, ‘꽝조사’님은 맨날 꽝이라고 제발 꽝만은 면해 달라고 해서 ‘꽝조사’다. ‘핸펀과우럭사이’님은 좀 절박하다. 핸드폰 대리점을 하는 분인데 늘 낚시가고 싶어 온 몸이 근질근질하단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는 생업을 위한 대리점 지키기와 우럭 잡으러 가서 바다에 떠 있는 마음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눈먼고기’님은 고기들이 제발 눈이 멀어 자신의 낚시 바늘만 물어달라고 붙인 이름이다. 이 사람들의 나이?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이 사람들이 출조 전에는 카풀 때문에 휴대폰 통화를 하기도 한다. 그 내용은 대개 이렇다.

“람바다님, 쌍문동에서 태권브이님을 태우고 성북동 아리랑고개로 오세요. 꽝조사님과 눈먼고기님은 아리랑고개로 바로 오기로 했구요. 핸펀과우럭사이님과 길을찾아님과 백두조사님은 양재에서 바로 출발한답니다. 행담도에서 어벙이님만 태우면 됩니다.”

이럴 때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가끔 한마디 한다.

“참, 나잇살들 먹어가지고 가관이네.”  

집에서 휴대폰을 아내가 대신 받을 때도 그렇다.

“여보, 강물님 찾네.”

본명을 모르니 강물님을 찾을 수밖에.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아내가 활동하는 동호회는 식물도 기르고 집안도 꾸미는 뭐 그런 동호회인데, 그쪽 아줌마들 닉네임도 가관이다.

‘브룩실패’, ‘핑클리아’, ‘초록이좋아’, ‘이쁜꽃’, ‘꽃을든손’, ‘바비걸’, ‘목련댁’, ‘가시많은장미’, ‘마를린문자’......
Commen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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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백마3호 2011.07.27 17:32
    강물...
    친근하네요... 소박하네요...
    강물은 흘러 바닷물에 모인다...
    저는 과거에 '푸른바다'가 닉네임이였는데 푸른바다라는 선사가 생겨 철수했습니다...ㅎㅎ...
    저도 하주간님 대신 강물로 알겠습니다...홧팅,,,
  • ?
    감성킬러 2011.07.27 17:55
    좋아하는 장르를 쫓아 동호회 활동을 하다보면 정말 재미있는 닉네임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느덧 실명은 까맣게 잊혀지고, 정작 실명이 필요한 순간이 되면 당황할 때도 많았습니다.

    <람바다님, 쌍문동에서 태권브이님을 태우고 성북동 아리랑고개로 오세요. 꽝조사님과 눈먼고기님은 아리랑고개로 바로 오기로 했구요. 핸펀과우럭사이님과 길을찾아님과 백두조사님은 양재에서 바로 출발한답니다. 행담도에서 어벙이님만 태우면 됩니다.>

    낯익은 닉네임이 등장하는 통화 내용이 아주 압권입니다. ㅋㅋㅋ
    재미있고 즐거운 닉네임 이야기 즐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