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玆山魚譜)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이해하기.
2021년에 개봉한 흑백영화 자산어보,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이 열연했었지요.
◆ 자산어보(玆山魚譜) - 정약전(丁若銓)
정약전은 정조(正祖:조선22대 왕) 때 병조좌랑 등 요직을 지내며
천주교에 입교함과 함께 포교 활동에 가담했습니다.
정 씨 형제를 무척이나 아꼈던 정조가 죽고 순조 1년(1801년)에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돼
정약전의 동생인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를 보내지게 되었지요.
동생 정약용이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는 동안, 정약전은
흑산도 연안 어류를 관찰하며 기록한 <자산어보>를 저술했습니다.
자산어보(玆山魚譜)의 玆는 '검을 자'로 검을 黑(흑)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데, 흑산(黑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그는 만 15년간 흑산도와 가까이 있는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227종을 채집하고 연구해
해양생물학, 수산학 서적인 필사본 <자산어보>를 저술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문 방대한 자연과학서적으로, 세밀한 관찰과 묘사와
추론은, 약 200년이 지난 책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특별한 장비도 없이 해양생물을 잡거나 낚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 것을 보면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지요.
원래는 <자산어보>를 해양생물도감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한
도록(圖錄)으로 남길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동생은 형이 그림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지만,
강진에 유배 중이었던 동생 정약용이 '필사가 어려운 점을 감안,
그림보다는 글로 쓰면 좋겠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손암(巽庵) 정약전 선생은 동생의 충고를 받아 글로 저술했지요.
덕분에 필사본(筆寫本) 총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흑산도 서당을 짓고 주민과 아이들에게 글공부까지
가르치면서 지역 주민들과 친분관계를 두텁게 유지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자산어보>를 완성하는 데 흑산도 청년 주민이었던
장창대(張昌大) 등의 도움을 크게 받았지요.
장창대와 함께 물고기를 해부하거나 직접 관찰하고 어류의
아가미 호흡, 구조에 대해 또 태생 습성, 어류의 형태 분석, 먹잇감
포획, 계절별 생물 분포와 같은 다양한 연구가 충실히 한 흔적이
자산어보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저도 40년 바다낚시꾼으로 생활하면서 남해권 흑산도 연안과
통영까지 서식했던 우리나라 토종 어류와 감각류, 조개류에 대한
명칭, 분포, 생태, 유용성을 망라해 가며 저술한 자산어보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깊은 관심을 갖고 흥미 있게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잘 발달된 과학적 관접에서 본다면 두 어보(魚譜)는
아쉬움이 있으나, 그 당시로서는 저자의 깊은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심층 분석한 <최고의 어류 백과사전>이었지요.
※참고※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이 쓴 책입니다.
그러나 실제 정약전이 쓴 자필 필사본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 필본을 사후 정약용의 산지기 손자가
자산어보를 벽지로 사용한 것을 보고 경악한 정약용이 조카들과 함께
자신들의 글씨로 필사해 다시 만든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자산어보'라 합니다.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 김려(金鑢)
1803년(순조 3)에 담정(潭精) 김려가 저술한 어류에 관한 책입니다.
1책 43장의 필사본으로〈담정유고 潭庭遺藁〉 제8권에 수록되어 있죠.
담정 역시 같은 시기에 정약전과 함께 1802년 천주교 박해 때 2년 6개월
동안 경남 진해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매일 근해에 나가 각종 어류의 생태·
형태·습성·번식·효용 등을 세밀히 조사, 관찰하여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우해(牛海)는 현재의 창원에 있는 진해(鎭海)를 뜻합니다.
우해이어보는 내용은 저자의 서문을 싣고 다음에 25장에 걸쳐 볼락,
문절망둑, 감성돔 등 어류 53종, 대게, 달랑게 등 갑각류 8종, 전복,
반달조개, 앵무소라 등 패류 11종 등 모두 72종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생선 식해로 이용한 감성돔, 새의 부리처럼 길고 침처럼 뾰족하며
회로 먹으면 맛있다는 학꽁치 등 어패류를 세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여기에는 오언고시(五言古詩)와 <서원산보 西園散步>, <답김계량서
答金季良書>, <선생부군묘문 先生府君墓文> 등 65종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고, 서문에 따르면 진해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12세가량 되는 어린이
어부를 데리고 바다에 나가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때로는 둘이서 며칠씩 바닷가에 있으면서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네요...^^
그것은 낚시보다는 온갖 종류의 바다생물을 관찰하는 데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었고, 수많은 물고기를 보았으나 이름을 다 알지 못하고, 진해의
방언도 잘 몰라 모두를 기록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귀양에서 풀려나면 고향에 가서 농부나 나무꾼들과
더불어 경험한 풍물을 얘기하며 즐기기 위해서라고 전합니다.
본문에는 각종 어패류의 명칭·별명·방언명·형상과 크기·빛깔·생활습성·
포획방법·가공법·맛·효능을 설명했다고 하며, 대부분의 경우 해설의
말미에 해당 어패류를 주제로 저자 자신이 지은 칠언사율의 한시가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김려의 <우해이어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와 함께 우리나라
남해권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1803년에 쓴 것이고, 자산어보( 玆山魚譜)는
1814년에 쓴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서로 어류에 관심이 생겨
책을 쓰게 된 것일 뿐 서로가 정보교류의 연관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슷한 죄목으로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썼고,
김려는 진해에서 <우해이어보>를 썼으니 이 무슨 우연일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최초의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심층 분석한 최고의
어류 백과사전이었다고만 알고 있었던 '자산어보'보다 11년 빠른
우해이어보가 진짜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으로 인정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바다낚시인들도 이점 참고하여 기회 된다면 관심을 갖고 보시면
바다 생물에 관련한 지식을 더 많이 쌓을 수 있겠습니다.
4년 전, 낚시갔던 절해고도 가거도 전경
유배자(流配者)들은 대부분 죄를 짓고 천리길을 내려온 사람들이죠.
기본적으로 죄인이므로 일단 멀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두는 것이 상식입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가 유배지의 제일 조건이 되기 때문에 남쪽의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로 많이 보냅니다.
그것도 모자라 섬으로 보냅니다.
조선시대만을 놓고 봤을 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안에 유배지가 많았지요.
땅끝 해남과 강진, 그곳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진도, 완도, 보길도, 추자도,
제주도와, 남해안을 따라 남해와 거제도가 모두 유배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정 많은 유배자를 보낸 곳이 다름 아닌 거제도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섬과 달리 섬에 수군(水軍) 7진영이 위치하고 있는 터라 유배자
관리가 용이하고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특수성 때문이죠.
유배지로 귀양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겠지만,
그러나 개중에는 지조와 충절을 지키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도 분명 적지
않다는 것을 지금과 같은 후세에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요.
결과적으로 정치권력 간의 다툼 끝에 패배자가 유배를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게도 유배를 당하여 타의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긴 세월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었지요.
울분에 못이겨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위의 두 사람은 순응하며
지역만을 위해 또는 가진 자산을 이용 큰 업적을 이룬 분들입니다.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그 유명한 애민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했고요.
손암과 담정은 유배지의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따뜻한 인정에
힘입어 유배생활의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계급 타파와 평등의식으로 따뜻하고 소박한 인간미,
훌륭한 덕성을 가진 것을 발견한 민심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좋아하며
잘 따랐지요.
자산어보의 정약전은 좁은 절해고도의 흑산도에서 혼자 유배를 하면서
과부인 가거도 출신 가거댁과 함께 살며 아이도 출산합니다.
동네 낚시꾼인 청년 어부 창대에게 바다 생물에 관해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대역 죄인을 도울 수 없어요!" 하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창대가 혼자서 글공부를 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정약전은 창대에게
"그럼 좋아!~ 창대야!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서로 빠꾸면 어떻겠느냐?"
서로 지식을 거래하자고 솔깃한 제안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수락합니다.
이렇게 좁은 섬에서 자산어보에 올인한 반면,
한편, 김려는 육지인 진해에 유배를 간 까닭에 많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유배생활을 하지요.
그런 이유로 담정은 자기 주변 여성들의 뛰어난 능력과 고상한 인격의
빼어난 의기 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많은 글을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씨라는 술집 주모(酒母)를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했고,
조선시대의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백정의 딸 ‘심방주’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를 다른 사람보다도 훌륭한 인물로 형상화한 자유분방한 사람입니다.
이래서 김려는 당시 유행하던 패관문학류의 서정적인 분위기에 젖어들었던
사람이고, 반대로 정약용은 매우 건실한 학자이었던 것처럼 형인 정약전도
그런 학자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형식의 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합니다.
♣ ♣ ♣ ♣
요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당분간 낚시를 접고 있으니, 몸도 손도 모두
근질근질합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전화하는 조우님도 많이 계시는데, 존재의 이유도
알릴 겸 바다 낚시의 대선배이셨던 진해의 김려 님과 흑산도의 정약전 님을
타임머신 태워 모셔와 이런저런 바다이야기로 알배란에 인사 올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한 바다여행에 묵직한 선물을 챙겨 오시는
즐거움이 있길 빕니다.
고맙습니다.